[AoN] 15초의 정치인, 고이즈미 전 총리

2001년 일언거사(一言居士)라는 비판을 받으며 일본의 이른바 '미디어 정치'를 이끌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15초형 인간으로 불린다.

특히 신문이 아닌 방송 미디어를 주 타겟으로 노리고 미리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발언을 쏟아냈던 고이즈미 전 총리는 어떤 경우에도 15초의 원칙을 지켰다.

그 15초의 원칙은 적효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집약적으로 정리해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서  15초 안에 마무리했고,  짧고 쉽고
신선한 15초 짜리 발언은 기자들에 의해 편집되거나 잘려나가지 않고 자신의 의도 그대로 전파를 탔다.

그는 방송 뉴스에서 쓰이는 인터뷰의 '길이', 보다 솔직히 말하면 방송 기자들이 뉴스를 편집할 때 고민하는 방송 인터뷰의 길이에 대해 누구보다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왜 15초짜리 멘트를 쏟아냈을까?"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바로 저녁 종합 TV 뉴스에 할애된 방송뉴스의 시간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방송뉴스는 대체로 1분 20초에서 1분 40초 사이로 만들어진다.
물론  의제 설정을 위한 기획기사나 대형 특종기사의 경우에는 훨씬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

2분이상.

그런 예외를 빼곤 대부분의 스트레이트 기사, 즉 단순 사실 전달 기사에서 15초가 넘는 인터뷰는 쓰기 어렵다.

전체 분량 1분 30초 즉 90초는 보통 인터뷰 2 부분과 기자의 스탠드업을 포함한다.
인터뷰는 대체로 10초 내외, 스탠드업도 15초 정도로 이뤄지는데, 이것만해도 벌써 35초다.

특히 방송기자의 리포팅 중에 포함된 인터뷰 내용이 길어질 경우,
시청자들은 뉴스에 대한 집중도나 몰입도가 떨어질 수 있는데,
이를 우려해서 인터뷰는 15초 이내로 정리하는 게 관행 아닌 관행이다.

(특히 기자 초년병 시절엔  15초짜리 인터뷰도 부담된다. 만약 입사 1년차 기자가 15초짜리 인터뷰를 썼다간 선배들로부터 박살날 게 뻔하다)

언변이 뛰어난 전문가라고 소문이 나서 인터뷰를 위해 찾아가보면
말을 너무 많이, 길게 해서 정작 뉴스 편집때 길이 때문에 애를 먹는 경우가 적지않다.

전문가의 인터뷰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30초 넘게 써야 내용이 완성될 경우에는
아예 그 부분을 쓸 수가 없다.

결국 방송기자는 편집 과정에서 10초~15초 사이에 딱 들어맞는 인터뷰 부분을
골라 쓸 수 밖에 없고,

해당 전문가로서는 "저 무식한 기자가 왜 핵심 내용을 말한 부분은 안 쓰고
이상한 내용을 갖다 썼지?"라고 의아해 할 수 밖에 없다.  


(여기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전여옥 전 KBS 아나운서의 재미난 글이 있어 소개한다)
전여옥의 방송비평 - TV 뉴스는 「죽은 詩人의 사회」 중 발췌

TV는 어떤 인간을 좋아하는가? 답은 「15초 인간」이다. 15초 동안 말을 툭 던질 수 있는 인간을 좋아한다. 특히 TV 뉴스는 길게 말하는 인간을 싫어한다. 왜 고이즈미(小泉)가, 다나카 마키코가 거품과 같은 부글부글 올라오는 인기를 얻었을까? 일본 기자들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15초 인간이다」라고 답한다. 15초 안에 「쌈빡」하게 요점을 던지며 말할 수 있는 TV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뜰 수 있었다는 말이다.
 
  내용이나 깊이 있는 말보다는 「15초 말」로 끝낼 수 있는 인간이면 TV 뉴스에서는 환대받는다. 물론 이 뉴스 속의 인터뷰는 변화하는 21세기에는 더욱 더 짧아졌다. 때로는 7초, 대개 10초 안팎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경영컨설턴트인 톰 피터즈는 『TV 인터뷰 대신 라디오 인터뷰를 하라』고 CEO들에게 권유하기도 한다.
 
  『라디오는 적어도 10분이 넘는 시간을 당신에게 할애하지만 TV 뉴스의 기자들은 무 자르듯 당신의 말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편집한다. 더구나 당신의 의도와는 크게 어긋나게 10초 혹은 15초로 편집한다』고 말한다. 노련한 톰 피터즈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TV가 얼마나 냉정한지를, 때로는 사람을 얼마나 쉽게 바보로 만드는지를 수없이 매일매일 뉴스에서 확인한다.
 
  가령 예를 들면 이런 뉴스가 있었다. 한 대학병원의 의사 K씨─나름대로 그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전문성을 인정받는 의사다. K씨가 TV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갑자기 뇌에 이상이 왔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전문가로서 성심성의껏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 「초등학교 5학년을 시청대상으로 본다」는 TV의 특성에 맞게 쉽게 친절하게 인터뷰를 했다.
 
그날 그는 저녁 뉴스를 보았다. 그가 인터뷰한 꼭지가 시작되었다. 기자는 그가 브리핑해 준 것을 취재원본으로 삼다시피 해서 거의 토씨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보도를 했다. 이어 전문가로서 그의 인터뷰가 나왔다. 물론 10초를 넘지 않았다. 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되도록 빨리 병원에 가는 것이 좋습니다』였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것은 하나마나한 이야기. 도저히 전문가의 언급이 아니었다. 의사로서, 한국사회에서 알아주는 전문인으로서 그의 언급이 이렇게 「우스꽝스럽게」 편집되어서 방송된 것이다.
 
  그 다음날, 그는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한테서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전화를 수없이 받았고 그 병원 안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는 한 4분 동안 열심히 열변을 토했건만 기자는 거두절미하고 「되도록 빨리 병원에 가는 것이 좋습니다」라는 오로지 그 말만을 편집한 것이다. 그뒤부터 그는 TV 인터뷰는 되도록 사양한다.



여하튼 다시 고이즈미 전 총리로 돌아가서.
그가 일언거사라는 비판을 받으면서까지 쏟아낸 15초짜리 발언들은
후일 "one phrase politics"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하게 했다.

물론 전여옥 전 의원의 지적대로
방송 뉴스 인터뷰의 길이가 내용보다 우선시되는 뉴스편집의 본말전도는
어쨌든 앞으로 개선방안을 찾아봐야할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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