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oN] 외국인 범죄자의 인격권과 이니셜 표기




성폭행 피의자 R이병이 맞을까? 아니면 로빈슨 이병이 맞을까?

잊을만하면 주한미군 병사들의 범죄가 붉거진다.
거기에다 무자격 영어강사, 외국인 노동자, 중국동포 등 근래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 유입되면서 주한 외국인의 이름이 뉴스의 사건사고 기사에
용의자 또는 피의자로 자주 등장하게 됐다.

매번 이들 사건을 기사화할때마다 약간씩 기사 작성의 곤란함을 느끼곤 하는데,
다름 아닌 '이름' 때문이다.

예를들어 내국인 피의자의 경우 '변학도'라 한다면,
기사에 혐의를 묘사하면서 나이와 성만 표기한다.

지난밤 45살 변모씨가 18살 성모양을 성추행하다가 지나가던 시민 21살 이몽룡씨에게 들켜
달아나다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피의자인 변학도, 피해자인 성춘향은  성씨만 기사에 표기하고
나머지 이름은 대체로 밝히지 않는 것이 피의자나 피해자에 대해
방송사가 지켜온 인격권 존중의 방식이다.
(여기서 이몽룡씨는 아마도 본인의 이름이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는 걸 원할 수도 있다.
의로운 일을 한 셈이니까. 물론 설정이지만)

그런데 외국인 피의자의 경우에는 이 단순한 셈법을 적용하기에 다소
애매모호해 진다.

지난 2011년 9월 17일, 주한미군 21살 '마이클 로빈슨'(물론 가명이다)이라는 이병이
서울 마포의 한 고시원에 들어가 여고생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은 일이 있었다.

일간지 몇군데에선 주한미군의 범죄가 괘씸하게 여겨졌는지,
마이클 로빈슨이라는 피의자의 실명을 그대로 명시했다.

반면 파급력이 큰만큼 기사 표현에 신중할 수 밖에 없는 지상파 방송사에선
R모 이병이라고 에둘러 표기했다.

언뜻, 변학도를 변모씨로 표기하니, 마이클 로빈슨을 R이병이라고 표기하는 게
형평성에 맞는 듯 보인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내국인 피의자인 변학도에서 성씨인 변을 밝혀 기사를 썼다면,
외국인 피의자인 마이클 로빈슨에서도 Family Name인 로빈슨을 밝혀주는 게 공평하다.

R모 이병...이라.

로빈슨? 라이언? 러셀?

이니셜 R로 시작하는 미국의 Family Name은 다수이기 때문에
내국인 변모씨보다 외국인 R씨의 인격권을 더 강하게 보호해 주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기자들이 R이병이라고 표기한 건,
주한 미군에 로빈슨 이병으로 표기할 경우,
21살이라는 나이와 함께 피의자가 '특정'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중범죄자라도 인격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우리 방송 뉴스의 현실 속에서,
피의자 특정은 방송사 기자들에게 피해야 할 중요한 불문율이기 때문에
방송기자 자신도 모르게 피의자인 로빈슨 이병을 R이병으로 과도하게
보호해 줬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반전 상황!이 있는데,
바로 로이터나 AP, AFP 등 오히려 외신에서 들어오는 사건 사고 뉴스의 경우
과감하게 피의자의 이름을 공표해 버린다는 점이다.


31일 AP통신 등은 플로리다 마이애미 출신의 매튜 앤드류 카터(68)가 지난 15년 동안 미국과 아이티를 왕래하며 50여 명의 아이티 어린이를 성적으로 학대한 혐의 등으로 165년을 선고받았다고 보도했다.(2013년 8월 1일 세계일보 발췌, 나머지 생략)

미국에선 성추행범에 대해서 실명과 나이를 고스란히, 적나라하게 명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안에서 미국인이 범죄를(그것도 더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엔
오히려 인격권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이름을 익명 처리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내국인보다 더 엄격하게 보호해주면서.

외국인의 범죄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보이는 중국 언론의 기사 표기 방식을 보면
우리나라의 기사 작성 관행을 다시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생긴다.

14일 중국 관영 중궈신원왕(中國新聞網)에 따르면 상하이시 검찰은 상하이 푸동(浦東)구내 프랑스 학교의 미국 국적 교사 맥마흔 데이비드를 13일 아동 성폭행 혐의로 구속했다.(2013년 6월 15일 문화일보 발췌, 나머지생략)

수사기관이 외국인 피의자의 신원을 절대로 밝힐 수 없다며 버티지 않는 한,
그의 이름을 알파벳 대문자 딸랑 한자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Family Name을 꼭 밝혀 쓰는 것이 외국인 피의자에게 오히려 과도한 인격권 보호를
해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피하고, 내국인 피의자와의 형평성과도 맞는 것이 아닐까.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AoN] 인터뷰 자막 처리의 기준

[AoN] 눈동자가 사라졌어요? 블루스크린과 그린스크린의 비밀

[AoN] picture in picture(PIP)/일명 구멍파기